설립자 김응조 박사
여는 말
"이 민족 역사의 어둠 가장 깊을 때 복음의 빛 밝아 온 한 세기, 그 헌신의 세월과 함께 걸어오신 당신은 진실로 우리 생명의 님이신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자이며 이 민족의 뛰어난 영적 지도자, 한국 교회의 오랜 증인이시며 겸손한 랍비이십니다." 이 글은 김응조 목사의 소천을 애도하며 쓰여진 조사중의 일부분이다. 일평생 혼신의 힘을 다해 하나님의 영광과 조국의 구원을 위해 지사 충성을 다한 영암 김응조 목사, 그는 성결교회의 믿음의 아버지였으며, 격랑의 한 세기에 민족사의 흑암을 밝힌 복음의 등불, 이 시대의 모세였다.
김응조 목사의 생애
출생과 입신
김응조 목사는 한말 급박하고 불안한 정치적 변혁기인 1896년 12월 3일에 반도 강산에서도 제일 극동인 소백산 줄기에 놓인 경북에서 출생하였다.
강직하고 유연한 성격의 부친 김원섭 씨와 모친 함영국 씨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부모의 가르침과 사랑을 받으며 건강하게 성장하였다. 순탄하게 자라온 그가 7살이 되는 어느 날, 외조부를 따라 영덕의 큰길에 나갈 기회가 있었다. 때마침 위풍당당한 원님의 행차가 지나가자, 어린 김응조는 호기심과 부러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무엇을 하면 나도 이 다음에 저렇게 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외조부는 “누구든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저렇게 된단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이로부터 어린 김응조의 마음에는 원님에 대한 꿈이 자리를 잡게 되었고, 마을 서당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하였다. 어찌나 열심히 공부를 했던지 12살이 될 때, 그는 『대학』, 『맹자』, 『중용』 등 사서를 독파하여 능히 통달하고, 특히 『맹자』와 같은 경우에는 300독을 하여 “맹자가 곰탕처럼 마음에 흐뭇할”정도로 한학에 익숙하게 되었다. 1910년 14살이 되던 바로 이때는 풍전등화와 같던 이씨 조정의 운명이 일제 강점으로 끝이 나고, 조선 민족은 그 마음을 어디에다 두고 그 통한을 무엇으로 달랠지 모르는 망국의 해였다. 8월 22일 한일합방 조약이 조인되면서 나라가 송두리째 일제의 속국이 되자, 이에 격분하여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고자 하는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애국 지사들은 일제의 무단정치에 의해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해외로 망명하여 무장 독립운동과 외교적인 수단에 의한 독립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이러한 때, 마침 서울에서부터 내려온 애국 지사 최봉희는 마을 사람들을 교회당에 모이게 하고 애국심 고취와 함께 기독교의 수용이 곧 구국(救國)의 길임을 설파하였다. “우리가 일본을 물리치고 독립을 하려면 미국 사람과 친하고, 미국 사람과 친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 꾸역꾸역 모여 최봉희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고 집단으로 입신의 뜻을 표하였다. 이때 김응조의 부친인 김원섭도 5인의 가족과 함께 교회에 입교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로써 소년 김응조는 12살 때에 부친의 교회 출석으로 처음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곧 마을에 교회가 설립되고 교역자들이 부임하자 어린 김응조와 그 부친은 이들을 통하여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교육열이 강한 소년 김응조의 부친은 아들을 경산에 있는 계동학교에 보내어 신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원님의 꿈을 가지고 한학에 열중하던 김응조는 신학문을 공부하면서 그 꿈을 포기하게 되었다. 어느 주일날 동화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모세에 대한 설교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은 소년 김응조는 원님이 아닌 모세의 꿈을 갖게 되었다. 2년간 그는 계속해서 학교 모퉁이 작은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나를 모세처럼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였다. 계동학교를 마친 그는 대구에 있는 미션학교로 진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는 영남에 있는 유일한 기독교 계통의 학교였는데, 그가 입학한 것은 1914년 18살 때였다. 그러나 집안 사정은 생활고로 점점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그는 집안으로부터 학비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김응조는 고학을 해서라도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하고 한 시간에 5전씩 받고 하루 5시간씩 힘든 일을 하였다. 그는 학비 조달을 위해 인분 통을 메고 보리밭에 거름 주는 일, 마차를 끌고 짐을 운반하는 일, 학교에서 운영하는 직조 농장에서 직조 작업을 하는 일 등 상상도 못할 중노동을 하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학비 조달이 부족한 때문에 기숙사 밥을 사 먹을 수 없으므로 값싼 안남미 쌀을 사서 식사를 했으며, 자취를 하다 보니 더욱 공부할 시간이 없어졌다. 옛날의 모세는 바로의 궁중에서 애굽의 모든 학문을 통달하였으니, 오늘의 모세인 나도 무식해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하여 밤을 이용해서 공부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어려운 고학 생활 중에도 김응조는 ‘90점 이상 받지 않으면 세 끼 밥을 먹지 않겠다’는 결심 아래 힘써 애쓴 나머지 고진감래의 결과로 우등생이 되었고, 드디어 1916년 9월경 졸업하게 되었다.
경성성서학원 입학과 일본 전도
계성학교를 졸업한 그는 당장에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네 가지 길을 예상해 보고 고민하였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부모의 요망대로 의사가 되는 길이요, 둘째는 자기를 가르친 선생님의 지도를 따라 실업가가 되는 길이요, 셋째는 본인이 스스로 원하는 바 법률을 배워 변호사가 되는 길이요, 마지막 넷째는 12살 때에 2년간이나 산에서 기도했던 모세가 되는 길이었다. 결국 고민 끝에 그는 자신의 세 번째 뜻에 따라 변호사가 되려고 법률 전수학교에 입학 시험을 쳤는데 부족한 일본어 지식으로 낙방의 쓴 잔을 마시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겠다는 뜻을 굳히고 선교사의 소개장을 구하기 위해 게일(J.S. Gale), 곽안련(廓安連, Charles Allen Clark) 선교사를 찾아가 통사정하며 부탁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미국행 시도가 처음부터 잘 이루어지지 않자, 이번에는 상해로 건너가서 임시정부 요인의 도움을 받아 도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인천에 가서 상해행 선박의 짐짝 속에 들어가 밀항하려고 시도했으나, 이것마저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주께서 이미 이 민족의 역사에 모세로서 자신의 갈 길을 정하셨건만 아직 그 길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이처럼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지만 자신의 미래 행로가 사방으로 막히자 극심한 자학과 번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삶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모욕이요,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조건”이라는 사(死)의 철학을 부르짖던 그는 끝내 자살하기로 마음먹고 한강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통금 시간이 다 된 자정 가까운 시간에 한강 철교를 잡고 밤하늘을 쳐다보자 갑자기 달빛 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그는 마음 가운데 “잠깐만 참아라”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때 그는 어머니와 하나님이 자살하려는 자신을 구원하시는 음성인 줄로 깨닫고 죽는 일을 일단 뒤로 미루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밤을 뜬눈으로 새운 그는 오늘 한 번만 더 속아 보자는 마음으로 정처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멈춰섰는데, 그곳은 바로 동양선교회 경성성서학원이었다. 그는 성서학원 원장인 토마스(J. Thomas) 목사를 만나서 자신의 처지와 포부를 말하였다. 그러자 토마스 원장은 미국이 아니라 이곳에서도 얼마든지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입학 연령이 한 살 부족하니 내년에 오면 받겠다는 입학 허가를 구두로 약속하였다. 이에 그는 낙망과 좌절 중에 소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기도와 성경 연구로 1년간 준비한 그는 1917년 4월 드디어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어릴 때 모세의 꿈을 가졌던 김응조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곳까지 인도하셨음을 감사하며 성서학원을 모세의 미디안 땅으로, 바울의 아라비아 수양처로 생각하고 일생을 하나님께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입학한 지 한 달만에 일본에 있는 카우만 총리로부터 한국 신학생 가운데 일본어를 잘 하는 사람을 선발하여 일본 전도에 합세하게 해 달라는 통지가 왔는데, 김응조는 선발된 7명중의 한 사람으로 뽑히게 되었다. 그 해 5월 10일 그는 다른 6명의 전도 대원과 함께 일본에 도착하였다. 기도 중에 일본 전국에 호별 방문 전도를 하라는 계시를 받은 카우만 총리는 선교사를 대장으로 하여 일본인 9명에 한국인 1인씩 총 11명을 1개조 전도대로 하여 10개 전도대를 구성하였다. 카우만 총리는 일본을 10지역으로 나누어 각 지방에 전도대 한 대 팀을 파송하여 가가호호 방문하며 『하나님의 선물』, 『당신이 섬길 하나님』이라는 책자와 전도지를 배포시키며 일본 전역을 복음화시키려는 ‘지방 전도운동(천만 집 전도운동)’을 펴 나갔다. 신학생 김응조는 해리스 선교사의 전도대에 배속되어 일본 최남단인 큐슈(九州) 지방 각지를 다니면서 전도 활동을 하였는데 낮에는 개인전도, 밤에는 노방 전도와 천막 전도를 하였다. 그 결과 1년간 10만 집에 10만 권의 책을 전달하였고, 33번 노방 설교와 개인 전도의 열매를 맺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고국으로 돌아왔다.
삼일 독립운동과 선만(鮮滿) 전도
1919년 고종의 인산일인 3월 3일을 기해, 이보다 이틀 앞선 3월 1일에 전국적으로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민족 대표 33인은 파고다 공원에서 자신들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고창함으로 조선 민족의 자유 독립에 대한 의사를 세계 인류에 천명하였고, 세계의 여론을 환기시킴으로써 평화적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할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일제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이 운동은 3월에서 4월까지 걸쳐 절정을 이루었는데, 만주뿐 아니라 미국에 있는 한인 교포들에게까지 파급되어 워싱턴 기념관에서도 독립 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이러한 독립운동이 있기 전에 먼저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경성 시내에 있는 전문학교 학생들을 동원시켜 독립 만세를 선창케 하였다.
그때 서울에 있는 전문학교는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감리교신학교, 경성성서학원 등 네 곳이었는데, 한 학교에 20명씩 도합 80명이 남대문에 집결하여 파고다 공원까지 만세를 부르며 나가는 계획을 세웠다. 3월 1일 경성성서학원 대표로 참석한 김응조는 전문학교 8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고, 오전 8시가 되자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남대문을 지나 파고다 공원을 향해 나갔다. 그러나 곧 이 사실을 알게 된 일경의 저지를 받고, 학생들은 영천교로 빠져서 불란서 영사관 앞에 가서 다시 만세를 불렀다. 연도에 있는 시민들도 합세해 만세 대열은 삽시간에 수백 명이 되었다. 잠시 후, 불란서 영사가 밖에 나와 알았다는 손짓을 표했다. 특별히 신학생 김응조의 만세 대열이 이곳에 와서 만세를 고창한 것은 불란서 영사관 측이 조선 민족의 사정을 파리 강화회의에서 전해 달라는 뜻에서였다. 일제는 곧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체포령을 내리는 동시에 학교에 엄중한 감시를 하였고, 경성성서학원에서도 부득이 방학을 결정함으로써 학생들은 귀향하게 되었다.
김응조는 많은 선언서들을 비밀리에 휴대해 가지고 영덕에 돌아와 고향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에 의해 체포되었고 병곡 지서에 구금을 당하였다. 다음날 장날을 기해 수만 명의 군중이 만세 운동을 벌이다가 성이 난 일부 군중들이 대중 심리에 이끌려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이 일로 인해 수백 명이 검거되고, 김응조도 이때 검거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보로 대구 형무소까지 끌려가 옥고 생활을 하게 되었다. 때는 1919년 4월 15일이었다. 이로부터 5개월이 지난 9월 초순에 대국 법정에서 김응조에게 언도 공판이 4년 구형되었으나, 폭행에 가담치 않았다는 증거가 주재소 구류로 증명되어 1년 6개월형이 최종 언도되었다. 다음의 내용은 형을 언도받기 전에 판사와 나눈 심문 내용이다.
판 사 : 독립의 이유는 무엇인가?
김응조: 독립은 인간 양심의 요구이다. 노예와 독립 어느 것을 원하느냐 물으면 판사께서도 독립이라 말할 것이다. 판 사 : 일본과 조선이 합방으로 내선일체인데 노예라는 말이 무엇이냐? 김응조 : 일선 합방은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 합방이요, 조선인의 의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판 사 : 왜 민중을 선동하였느냐?
김응조: 내가 민중을 선동하고 싶어도 못한 것은 내가 서울서 내려오자 형사들이 나를 데리고 가서 유치해 두었기 때문에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해서 선동을 못하였으나 그들은 벌써 다음날 장날에 독립 만세를 부르기를 작정하였으니 이것은 누구 개인의 선동이 아니라 조선 민족의 공통된 애국심의 호소로 생각한다.
판 사 : 왜 관공서는 파괴하였는가?
김응조 : 그것은 내가 주재소에 구류되어 있는 동안에 된 일이니 알 수 없으나 민중들이 그만큼 일본의 식민 정치를 싫어한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판 사 : 독립 만세를 부른다고 될 줄로 믿는가?
김응조 : 우리의 만세 소리는 일본의 총칼보다 강하기 때문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반드시 조선에서 성공될 줄 믿는다.
일제에 의해 옥고 생활을 하게 된 김응조는 옥중 생활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고 성경을 읽는 일에 전심하였다. 그는 기도 중에 전도할 기회를 모색하여 수백 명에게 전도한 결과 옥중 전도자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다. 드디어 그는 1920년 7월 15일에 출옥하였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경성성서학원 신학생 참여자 19명은 대개 간단히 얼마간의 구류를 살고 나왔으나, 유독 그만이 죄 없는 죄수로서 미결수 기간까지 합하여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조국을 위해 고생한 만큼 천국을 위하여도 피 흘리는 헌신을 하겠다는 각오로 3개월간 고향에서 휴양을 마치고 상경하였다. 성서학원에 가보니 이미 동기생들은 졸업하여 각기 임지로 떠났고, 성서학원장인 헤슬롭(William Heslop)이 위로를 해 주며 반갑게 맞아들였다. 헤슬롭 원장은 곧 교수회의를 소집하여 그 동안의 옥고 생활과 평소의 실력을 인정하여 졸업장을 주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김응조는 실상 수양 기간 3년 중에 1년만 공부를 하고 졸업장을 받게 되니 감격의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없었다. 이때는 1920년 10월 1일로 그의 나이 23세였다.
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응조 전도사는 ‘한국을 나의 교구로 삼아 주소서’ 라는 기도와 함께 한국 지도에 의주에서 부산까지, 그리고 인천에서 원산까지 종횡으로 붉은 십자가를 그려 놓고 기도하였다. 그는 본부의 파송 결정에 따라 강원도 철원교회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는 경기도 광주 경안교회, 그 뒤에 안성의 안성교회, 서울 아현교회를 거쳐 5년간 전도사로 사역하다가 1926년 4월 10일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30세에 목사가 된 김응조 목사는 그 해 10월 광활한 미개척지인 북선 지방 감리목사로 임명되어 함경남북도, 북부 강원도 일부, 북간도 전체를 책임지게 되었다. 당시 성결교회 5개 지방회 가운데 하나인 북선 지방은 북청 군내 5개처 교회와 함흥, 회령, 북간도 용정, 강원도 강릉 등 10개 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김응조 목사의 부임 후 5년 동안의 결과는 30교회가 증가되어 40교회가 되는 등, 북선 지방의 교세 신장은 놀라운 부흥으로 나타났다.
김응조 목사는 북선 지방 중앙지인 북청에 주재하면서 신 개척 계획을 세웠는데, 그 방법은 소도시가 아닌 대도시 점령을 통한 교회 설립이었다. 원산, 함응, 성진, 서수라 등 대도시를 먼저 점령하여 성결교회를 세우면 그 사이의 중간 도시는 쉽게 세울 수 있는 설립 계획이었다. 이처럼 북선 뿐만 아니라 당시 북선 지방에 속했던 만주 전도에도 힘써 일 년에 수 차례씩 부흥회를 인도하여 재만 성결교회(在滿 聖潔敎會)는 물론 장·감의 교회까지 부흥의 불길을 붙게 했다. 그는 주로 남만(南滿)의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만주 선교에 주력하였다.
유달산 신유 체험과 신사 참배 거부
북선과 만주에서 이처럼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동분서주하며 온 힘을 다하여 전도 사역에 힘쓴 결과 성결교회 부흥과 함께 김응조 목사 자신에게는 중병을 가져다 주었다. 다음의 글은 북선 지방을 떠나면서 지난 4년간 사역을 회고하며 쓴 글이다.
나에게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폐병자와 동거도 하고 열병자와도 한 방에서 뒹굴고 사귀 병자와 한 방에서 철야도 해보고 몇백 리 길을 도보로 걸어가기도 하였고, 교회 사건이 있을 때에는 진 에 서서 지휘도 하였고, 순회하는 교회마다 집회로서 그들의 영적 부흥을 도모해 주기도 하고 … 중략 … 이렇게 활동하는 동안에 유한한 나의 육체는 외강내허의 위험한 지경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르게 되었다.
그가 가진 중병은 신경쇠약에 소화불량, 불면증, 폐렴이었다. 따라서 의사의 권고에 따라 부득이 북선 임지를 떠나 여섯 식구 가족과 함께 경성(서울)으로 올라온 김응조 목사는 거처할 곳을 찾지 못해 시내에서 떨어진 영도사 절 밑에 초가집을 30원에 사고, 옷가지를 팔아 구명책으로 채소 장사를 했다. 그러는 동안에 병은 더 진행되어 세브란스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 본 결과 폐병 2기였다. 폐병 2기의 선고를 받은 그는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차츰 몸의 증세가 이것을 증명하자, 교단 본부에 찾아가 자기의 처지를 말하고 의사의 권고대로 남쪽 따뜻하고 조용한 곳으로 파송해 주면 좋겠다는 요청을 하였다. 이에 교단 본부에서도 요양을 위해 따뜻한 남쪽 지역에 놓여 있는 목포교회로 임명하였고, 그는 1930년 5월 15일에 목포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목포교회는 설립 기한이 5년밖에 안 되는 개척교회로 장년, 유년 합해서 15명인 미자립 교회였다. 따라서 김응조 목사는 교회와 주택, 그리고 생활고에 시달려 요양은 고사하고 병이 더 가중되어 고통과 낙망 가운데 죽음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육체의 병은 심령의 병으로까지 옮겨져 점차 절망의 벼랑으로 이끌어 갔다. 궁여지책 끝에 그는 죽기를 각오하는 큰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9월 1일 새벽 5시, 최후로 죽느냐, 사느냐, 이 두 문제를 갖고 하나님께 호소하기 위해 기어서 유달산을 올랐다.하나님의 응답은 그로부터 한 달만에 나타났다.
때는 1930년 9월 30일이다. 내가 기도를 시작한 지 만 한 달이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셨다. 죽음을 주시지 않고 은혜를 주셨다. 나에게 이상을 보여 주셨다. 내가 앉아서 기도하는 반석이 갈라지면서 밑창에서 생수가 솟아오른다. 넘치는 생수에 내 몸이 둥둥 떠서 있다. 이 환상이 지나간 후 정신을 차리니 내 마음에 기쁨과 소망과 평화가 샘처럼 솟는다. 그리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온몸에 불이 붙는다. 그때에 내가 내 몸을 보니 유리알처럼 맑아지며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고 몸은 날아갈 것같이 가벼워진다. 그때에 내 입에서 나오는 무심출의 말은 ‘나는 살았다, 받았다.’ 나는 자리에서 분연히 일어나서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 이곳에 좋은 샘이 흐르도다’(합동 239) 이 찬송을 몇십 번 불렀는지 알 수 없다.
이 체험 후에 하나님의 신유의 역사로 일곱 가지 병을 치유 받은 그는, 그 후로부터 남다른 건강을 노년까지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앉아서 기도한 곳을 영암(靈岩)이라 칭하였다(이때로부터 자신의 호도 영암으로 부름). 김응조 목사는 심신을 연단하고 갱생케 하여 하나님의 능한 도구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간섭을 깨닫고 감사와 기쁨에 넘쳐 교회로 내려왔다. 그는 자기가 체험한 일에 대한 간증을 하고, 새벽기도회와 낮에는 사경회로 100일간 부흥회를 한 결과 새 신자를 120명이나 얻게 되었다. 이 일 후에 김응조 목사는 매일같이 새벽에 유달산에 올라가 다도해의 90여 개나 산재한 섬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저 도서 지방 영혼들을 구원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중에 김응조 목사의 전도를 받은 우편국 서기로 근무하는 김홍기 청년이 자기 고향 암태도로 돌아가 전도하여 80명을 자기 집에 모아 놓고 김목사에게 전도 요청을 해 옴으로써 이 불길이 곧 후진도, 전진도, 암좌도, 추자도, 흑산도까지 파급되면서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렇게 목포교회를 맡아 도서 지방 전도에 성공을 하던 중에 총회 본부에서 그의 건강 회복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를 호남 지방(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감리목사로 임명하여 대전교회에 주재케 하였다. 그는 1931년부터 1936년까지 호남 지방회를 맡아 사역하는 중에 신개척 39개소, 교회당 건축 36처소, 신자의 증가 4,000명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그는 1936년 4월 연회에서 중부 지방(서울, 경기도, 강원도) 순회이사로 전도의 명령을 받아 지방 교회 순회에 몰두하며 독립문교회를 겸임하게 되었다.
1930년 중반기는 일제가 신사 망령에 빠져 신사 참배를 한국 교회에 강요하던 때였다. 처음에는 학교 학생들에게만 신사 참배케 하더니 다음에는 교회의 성도들까지 참배를 강요하고, 교회당 강단에 신단을 만들어 놓고 예배 전에 참배부터 먼저 시켰다. 따라서 이때는 목회를 하려면 신사 참배를 못 면할 어려운 시국이었다.
일제는 성결교회의 간부 중의 하나인 김응조 목사를 신사 참배 반대의 거두로 생각하여, 형사가 매일같이 찾아와서 계속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다. 김목사는 신사 참배하고 목회를 하느냐 아니하면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교회를 떠나느냐는 문제를 놓고 인왕산에 올라가 송림 속에서 피땀어린 기도를 계속하였다. 그는 매일같이 3개월간 산에 올라가 기도하였으나 확답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는 중에 성결교회의 최고 간부인 모씨가 신사 참배 무죄론을 주장하면서 지상에 글을 발표하였다.
김응조 목사는 ‘신사 참배는 국가 의식이요 우상이 아니라’ 는 그의 변절된 주장에 대해 몇 차례 반대하였으나 불응하므로 위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홀로 외로운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하고 1938년 5월 4일부로 교단과 교회를 떠났다.
金應祚 牧師 辭職
金應祚 牧師는 五月四日附로 辭職하였고 今後 自由 傳道의 길에 나서게 된다는데 主의 祝福이 함께하시기를 바라나이다.
1938년 성결교회를 떠난 김응조 목사는 가족의 생계 영위에 대하여 기도 중에 응답받고 혜화동 집을 살 수 있었고, 그곳에서 학생들의 하숙을 하여 생계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가족 생활 문제가 해결되자 이제 그는 초교파적인 부흥목사로서 시국이나 사상 문제를 떠나 각 교파를 막론하고 순복음만 전하였다. 그는 문서 전도를 통해 복음 전도를 국내외로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기독신보판과 같은 『生命之光』이란 신문14)을 만들었다. 그는 『生命之光』을 3천만 민족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3천부를 발행하여 국내외 만주, 일본 등지에 배포함으로써 일제 통치 아래에서 환난과 핍박을 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소망 중에 신사의 망령과 싸워 신앙을 견지케 하였다. 이 일은 4년간 계속되었는데 최고 5천부까지 발행하는 등 일제라는 흑암의 권세 아래서 전도지 이름 그대로 생명의 빛을 발하게 하였다.
8·15 해방과 부산 피난 신학교 교수
1942년 일제는 기독교 계통의 모든 잡지를 통폐합하여 『기독공보』 하나만 남겨 두었다. 따라서 4년간 발행했던 『生命之光』도 희생양이 되어 폐간되었고, 김응조 목사는 따로 할 일이 없게 되자 집을 정리하여 면목동 거먹산 밑에 초막을 지었다. 거기서 그는 일제라는 ‘뱀의 낯’을 피하여 기도하며 주님이 지시할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에 그는 1945년 8월 15일 정오 12시에 길을 걷다가 방송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은 일본에게는 청천벽력이요, 한국에 있어서는 천재일우의 순간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 만능주의의 망령은 더 이상 조선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김응조 목사는 해방 직후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가 각기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무질서와 혼란 속에 빠져들고 교회의 질서도 이와 한가지로 혼미할 때인 동년 10월에 동대문 감리교회 변홍규 목사의 초청을 받고 “신앙의 정화 ”라는 제목으로 해방 후 처음으로 갖는 대중 집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해방 직후 이렇게 지방 각지로 순회하면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던 그는 1946년 7월 『活泉』에 원고를 기고하기로 약속하는 것을 계기로 다시 성결교회로 돌아오게 되었고, 곧 경성신학교 전임교수로 초빙을 받게 되었다.
성결교회는 김응조 목사의 복귀와 함께 이건 목사, 박현명, 김유연 목사를 중심으로 일제로부터 무너지게 된 교회 재건의 발판을 놓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잠시뿐이고 삼천리 강산에는 다시 고통과 혼돈의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국은 둘로 분할되어 남한은 미군정 통치 3년을 지나서 이승만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고, 북한은 소련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여 공산 정권이 세워지게 되어, 반도 강산은 38선을 경계로 둘로 분단되었고, 급기야는 1950년 6·25 사변이 터지게 되었다: 생명의 피를 대가로 지불하고 얻어야 민족과 나라가 귀할 줄로 알 터인데 공짜로 얻은 때문 에 제각기 무슨 수가 난 줄만 알고 국가와 민족이 귀한 줄을 모르고 사리사욕에 도취하여 제각기 제 떡을 삼으려고 쟁탈전이 벌어졌다. 다시 매를 맞지 않을 수 없었나니 그것이 6·25 사변이요, 민족의 동란이다. 전자는 일제의 매요, 후자는 인공이라는 채찍이다.
남침 야욕에 불타던 북한은 소련과 중공의 힘을 믿고 남침을 강행하여 반도 강산 전역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김응조 목사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되어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봉래산(현 만리동 환일고교 부근) 중턱에 사는 한 신자의 집 지하실에서 쌀 한 말을 가지고 생식을 하며 보냈다. 하루는 기도 중에 ‘여기가 위험하니 피하라’ 는 지시를 듣고 은신처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피하니, 얼마 안 되어 전에 숨어 살던 그 집이 유엔군 장거리포에 맞아 산산이 부서졌다. 놀라운 기도의 응답이었다.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한 맥아더 장군이 파죽지세로 서울까지 올라오자 북한 공산군은 후퇴를 하면서 무차별 양민 학살과 방화를 하였다. 김목사는 서대문 신문로에 있는 집이 불타는 것을 보고 가방을 들고 가다가 충정로 굴다리 위에서 인민군 3명에게 붙잡혀 신촌에서 온 스파이로 오인받아 직결 사형 처분의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잠시 가방을 조사하였는데, 이때 별안간 신촌에서 제트기가 굉음을 내고 날아오자 그들은 폭격을 당할까 봐 혼비백산 도망하였다. 김응조 목사는 기적적으로 죽음으로부터 살아나게 되었다.
그는 1·4 후퇴로 국군이 다시 남하하기 시작하여 서울이 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피난민 대열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교직자 기도회가 열리고, 각 교단 대표들이 돌아가면서 인도하였다. 김응조 목사는 기도회 모임의 설교를 맡아 여호수아 1장 7절의 말씀을 가지고 전쟁의 실의와 비운에 빠진 피난민 성도들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는 제목으로 그간의 자신의 간증과 함께 설교를 하였다. 설교를 마치자, 기도회 주최측으로부터 계속 인도해 줄 것을 요청 받고 9일간 집회를 연속하여 인도하였는데, 기도회는 부흥회로 바뀌고 그의 메시지는 흙탕물 웅덩이 속의 한 모퉁이에서 쉬지 않고 솟아나 갈함을 면케 해 주는 영혼의 생수가 되었다. 김목사는 그 후에도 전쟁 중이나 마음에 끓어오르는 성령의 불길을 참을 수 없어서 영남 일대에 통지하여 초교파적으로 부흥회를 인도하며, 독특한 자신의 메시지인 ‘말세와 예수 재림’ 을 통하여 피난 중의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성도들에게 새로운 소망의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런 서울신학교는 동래 온천에 임시 피난 교사를 만들고, 피난 중인 신학생들을 규합하여 가르치고 있었다. 김응조 목사는 피난 신학교 교장으로부터 교수 임명의 교섭을 받고 금정산에 올라 기도한 후 응답을 얻자 흔쾌히 수락하고 교수 겸 부흥사로 학생들을 부흥회 식으로 가르치며 인도하기 시작했다. 신학교는 김응조 목사가 취임한 후로 부흥회가 열리는 부흥회 장소로 변했다. 피난 후 4년만에 다시 신학교가 서울로 복귀하자 이 기회에 김응조 목사는 조용히 서재에 들어가 저작 활동에 주력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곧 집필에 들어가 『성서적 정통 신학』, 『구약 역사 철학』, 『성서 난해구 해설』, 『나는 기도해서 얻었다』, 『황야의 과객』 등의 설교집을 위시한 19권의 단행본을 출간하는 저력을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경을 복음주의적 정통 기독교 입장에서 바르게 해석한 주해서가 필요함을 인식하여 『신약성서 대강해』를 1948년에 집필에 들어가서 1962년에 탈고하였는데, 『신구약성서 대강해』는 당시의 목회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 성경, 찬송가 다음으로 많이 구입하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이후에 김응조 목사는 이 6권의 책을 증보, 수정하여 12권으로 내놓았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제 학설과 하나님의 말씀이 혼합되는 것을 피하고자 노력하였다.
교단 분열과 성결교 신학교 설립
김응조 목사는 1957년 4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정화와 부흥’ 이라는 슬로건 아래 성결교회를 바로잡고자 애썼다. 그는 같은 해에 성결교회 희년 기념 사절로서 미국 교회 순방길에 올라 6개월간 60회 설교를 하며 한국 교회를 소개하고 독특한 말세 복음을 강론하였다. 미국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대하여 초기의 생명력과 신앙 열정을 잃고 형식화되고 속화되어 배금 물신 사상과 향락주의에 젖어 있음을 보고, 미국 교회의 풍조가 한국에 불어오지 않기를 기원하며 한국으로 돌아왔다. 해방 이후 신사 참배 유무로 인해 장로교에서부터 시작된 분열 현상은 1960년에 들어오면서 밖에서 밀려오는 외래 사조와 단체의 영향을 받아 더욱 심화되었다. 한국 성결교회도 1960년에 들어오면서 분열이라는 열병을 앓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NCC(National Council of Churches, 한국기독교 협의회)라는 연합 기관과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한국복음동지회)라는 신앙 운동 단체로 인해서이다.
1961년 4월 11일 16회 총회에서는, 15회 총회에서 NCC와 N.A.E. 두 기관에 대한 동시 탈퇴안이 보류되어 이월됨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거론되지 않고 오히려 양 기관에 더 많은 대표를 파송하기로 결정되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이명직, 이성봉, 황성택 목사와 함께 양 기관 탈퇴를 주장하던 김응조 목사는 이들과 함께 ‘복음진리동지회’ 를 조직하고 NCC 및 NAE 두 기관에서 단연히 탈퇴하여 성결교회 정통성을 수호하고 정체성을 확립하여 성결교회 본연의 순복음 신앙으로 돌아갈 것을 천명하였다. 교단 분립에 대해 김응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의 일부 교단에서 신앙 노선의 관계로 일어나는 분규와 분열의 바람은 우리 교단에도 불어 왔다. 3년간 이 문제를 가지고 싸워 오다가 1960년 4월 총회에서 정식적으로 분립되어 기성, 예성이라는 간판이 붙게 되었다. 그러나 진리는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에 있음을 알게 되면 문제는 간단하다. 나는 현대 정치에는 흥미나 관심이 없기 때문에 정치적 회합에는 별로 참여하지 않고 내가 맡은 일에만 충성할 뿐이다. 사람들이 나를 고집쟁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나의 교역 생활 60년은 진리 고집으로 일관하였다(일제 때도, 인공 때도). 충신이 고집이 없으면 수절을 못한다. 많은 사마리아 여인 가운데 84년 고집의 안나가 있지 않은가(눅 2:37). 예성과 기성 분립 이후에 김응조 목사는 당시 반공과 진리 보수를 강조한 ICC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국제기독교협의회) 의장 맥킨타이어 박사와 만나 4시간 동안 긴 대화와 토론을 하는 가운데 ICCC에 가입하게 되었다. 비판적인 안목에서 볼 때 ICCC와의 제휴는 성결교회의 역사적 뿌리에서 이탈하여 벗어나는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당시의 상황에서는 피할 수 없었던 현실적인 귀결이었다. 김응조 목사는 1962년 5월에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훼이스(Faith) 신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여 그간에 집필한 17권19)의 저서를 인정받아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김응조 목사의 도미의 목적은 학위 취득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이와 함께 8월 10일에 화란 암스텔담에서 열리는 I.C.C.C. 국제 대회 참석과 성결교 신학교 건립 기금에 대한 모금에 있었다. 그의 도미의 목적과는 달리 신학교 설립 모금 운동은 통역자와 활동 여비의 부족함, 안내자가 없으므로 훼이스(Faith) 신학교 객실에서 소일하며 그의 생애 중 가장 고통스럽고 답답한 시간을 안타깝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입을 열어 살아 계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꿈 가운데 “너는 어찌하여 미국 사람만 쳐다보느냐! 한국에도 하나님이 계시니,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한국 사람 가지고도 신학교를 얼마든지 지을 수 있으니 안심하라” 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는 곧 암스텔담 ICCC 국제 회의를 마치고 귀로 중에 성지 순례를 하고 9월 1일에 귀국하였다.
김응조 목사는 한국에 도착하자 미국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기도하는 중에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바라볼 때 “여기서 신학교를 시작하겠습니다” 라는 서원 기도가 기억나서 4일간 준비 끝에 9월 5일 드디어 신학생 모집 광고를 냈다. 10일이 지난 15일 응모자 60명이 원서를 내게 되었고, 시험을 치른 결과 적격자 50명이 합격되었다. 같은 달 20일에 명예 교장 이명직 목사와 함께 교장에 취임한 김응조 목사는 성결교 신학교의 개교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자신의 집 이층집 위, 아래에서 수업을 하였다. 일 년이 지난 다음 해에는 50명을 더 모집하여 좁은 집에 100명이 북적대는 와중에 심령은 주의 일꾼 될 선지 성도들을 인하여 기쁨이 찾아 왔으나, 육체는 잡무와 격무에 시달려 괴롭힘을 당하였다. 그는 초창기 신학교의 현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50명 학생을 상, 하층을 망라해서 한 집에 수용하니 마음은 한없이 기쁘나 육체는 사람에게 시달리어 괴롭다.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기 위하여 김치, 간장, 된장, 고추장 바가지를 들고 다니면서 이 집 저 집을 헤매든 광경도 가관이었다.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주님을 생각하면 이것도 감사하였다. 다음 해에 또 학생을 모집하니 역시 50명이다. 이제는 100명이 한 집에서 법석대는 판이다. 온 집안에 사람 천지이다. 안방과 복도까지 공개해도 100명을 수용하기는 불가능이다. 비용 문제도 막심하다. 누구 하나 도와 주는 사람도 없고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때는 1963년 1월 15일이었다. “약속한 사람을 보내 주시옵소서.” 눈물로 기도한 지 한 달만에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기도만 하지 말고 그 사람을 찾아 보라.” “아멘!” 그는 곧 일어나서 방명록에 작성한 이름을 찾아 나서는 운동을 하게 되었다. 이 일 후 2일 만에 마침내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바로 홍대실 권사였다. 그녀는 평남 진거동 성결교회 신자였는데, 죽음의 38선을 넘어 월남할 때 ‘살아서 남한으로 넘어가면 하나님을 위해서 큰 일을 하겠습니다’ 라고 서원 기도를 드린 큰 믿음의 여종이었다. 그녀는 이 일을 이미 실천에 옮기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김응조 목사는 바로 홍대실 권사를 만나서 성결교회 신학교를 건축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어떠냐고 권고를 하였다. 그녀는 기쁘게 허락하고 지금의 행촌동(예성 총회 본부 건물 자리)에 현대식 건물로 3층 교사를 신축하였다. 성결교 신학교는 김응조 목사의 사저에서 나와 어엿한 학교 건물을 가진 신학교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후에 홍대실 권사는 안양의 임야 2만 4천 평을 성결교 신학교에 기증하였고, 김응조 목사는 1974년 8월 이곳에 6층 높이의 1,500평 교사를 현대식으로 지어 안양 캠퍼스는 주간으로, 행촌동 교사는 야간으로 사용하였다. 김응조 목사는 성결교 신학교 교장으로 재임중인 1978년 10월에 저서 출판 이익금과 교통비 절약 등 웬만한 먼 거리라도 택시 안 타고 걸어다녀 근검 절약하여 모은 사재로 지방 학생들의 숙식과 경건 생활 함양을 위해 단독으로 기숙사(영암 기념관)를 지어 주님께 봉헌하였다. 또한 신 개척교회를 위해 영암 선교회를 통해 들어오는 수익원을 개척 보조금이란 명목으로 교회 개척과 미자립 교회를 돕는 일을 하였다. 김응조 목사가 세운 성결교 신학교는 그의 헌신적인 노고와 기도의 결과로 1966년부터 4년제 대학과 동등한 학력 인정을 받아 오다가 1991년 4년제 정규 일반대학인 성결교 신학대학으로 개편되었고, 1995년 4월을 기해 종합대학인 성결대학교로 발전하게 되어, 2001년 현재 10개 학부 3개 학과, 6개 대학원 총 6,500명 정도의 재적생을 가진 기독교 명문대학으로 성장하여 가고 있다. 한평생 하나님과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사역하던 영암 김응조 목사는 1991년 4월 17일 정든 예성 교단과 선지 동산을 떠나 주님 오시는 날까지 영면에 들어가게 되었다.
김응조 목사와 한국성결교회에 끼친 영향
교회사적인 면에서 바라볼 때 역사상의 인물은 그 누구라도 긍·부정적 양면이 있다. 여기에서는 주로, 긍정적인 입장에서 김응조 목사 생애를 중심 사역으로 성결교회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며 논하고자 한다. 한국성결교회의 한 축을 이루는 영암 김응조 목사는 이명직 목사와 더불어 한 세기 한국성결교회를 대표하는 교단적인 지주이다. 그는 성결교의 상징일 뿐 아니라 한국기독교사에서도 철저한 성서적 보수주의 신학자로서 한 획을 긋는 한국기독교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았다. 그가 한국성결교회에 끼친 영향을 김응조 목사의 다양한 사역과 관련되어 나타나는데, 그것은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그는 성서신학자로서 한국성결교회가 성서적 복음주의 전통을 견지하도록 하는데 있어서 영향을 끼쳤다. 김응조 목사는 복음주의라는 용어보다도 ‘정통 보수주의’ 또는 ‘성서적 정통주의’라는 말을 즐겨 썼는데, 혹자가 비평하듯 이것은 ICCC와 관련된 개혁주의적 칼빈주의로 변질이 아니라, 성결교회가 초기로부터 강조해 온 사중복음(온전한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다.22) ‘성서를 그대로 믿고, 성서 그대로 살라는 것이 곧 복음주의’23)라는 이명직 목사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김응조 목사는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성서에 입각한 재림사상과 사중복음 전파에 역점을 둔 성서적 복음주의를 강조하였다.24) 따라서 초기 한국성결교회 설립자들과 개척자들과 마찬가지로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입장에서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진보적인 이론신학을 배제하며, 보수신앙을 우호하는 신앙과 관련된 구체적인 성서신학을 치중하는 모습을 나타내었다
둘째, 그는 철저한 민족운동가로서 한국성결교회가 내세 지향적인 개인 영혼구원의 역할에 끝나지 않고, 민족에 대한 사회적 구원문제도 소홀하지 않도록 한국성결교회 민족운동에 새로운 방향을 열어 놓았다. 한국성결교회와 모체는 동양선교회로서 한국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의 교리적 강조점을 그대로 수용하여 개인 영혼구원의 직접 복음전도를 지향하는 교단으로 발전되었다.26) 김응조 목사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결교회의 비정치화 태도에 반하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루는 고난을 겪었고,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1938년 교단을 펴나기까지 하였다.
셋째, 그는 복음 전도자로서 한국성결교회가 선교 우선주의의 본연적 교단 특성을 견지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앞서 살펴본 대로 1917년 경성대학원 재학 중 일본 전도여행에 참여하였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교단을 잠시 떠났을 때도 ‘생명지광’을 발행하여 문서선교를 하였다. 그는 사중복음 중에 재림의 복음을 선교와 연결시켜 복음전도를 강조하였다. 실제로, 복음전파를 위한 개척교회 설립 시에 자신의 개인 재산을 마치 교단 선교기금과 같이 생각하여 요청하는 대로 무상으로 지원하였다.
넷째, 그는 42권이라는 방대한 책을 집필한 저술가로서 신학교육과 문서선교에 큰 일익을 끼치며, 그 영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크게 증대되고 있다. 김응조 목사는 1937년부터 1988년까지 성서대강해(2권을 비롯하여) 단행본 42권을 집필하므로 한국성결교회 신학과 신앙 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다섯째, 그는 교육가로서 기독교 명문사학으로 도약하려는 오늘의 성결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예성교단 목회자 양성과 인류사회와 지역사회, 국가에 이바지할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전인적인 하나님의 사람 양성’을 대학 설립 이념으로 삼고 1962년 9월 20일 성결교 신학교를 자신의 사저에서 시작하였다. 하나님 사랑, 국가 사랑, 이웃 사랑을 3대 교육지표로 삼고 학생 수가 약 5,500명에 이르는 종합대학교로 발전되었다.
여섯째, 그는 탁월한 교단 지도자로서 이명직 목사와 더불어 성결교회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예성과 기성교단 분립 전에도 총회장과 신학교 교수로, 그리고 예성교단 설립 시에 주역을 맡았는데, 오늘날 예수교대한성결교회가 1,033 교회에 이르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일곱째, 그는 능력 있는 부흥사와 목회자로도 한국성결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응조 목사는 1920년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뒤, 철원교회를 파송받은 것을 기점으로 1938년 독립문 교회를 맡을 때까지 여러 교회에 파송받아 목회를 하였다. 그리고, 성결교 뿐만 아니라 초교파 부흥사로 활약을 하였다. 1926년부터 1968년까지 순회부흥집회 횟수는 480회(성결교 290회, 장로교 136회, 감리교 54회)로 나타난다.
닫는 말
영암 김응조 목사, 그는 격동과 전환의 한 세기의 한국사와 운명을 같이하며, 한평생 이 땅에 복음만을 외치고 오로지 그 일만을 위하여 살다 간 성결교회가 낳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한국 교회가 낳은 모세였다. 그는 1907년 이래 지금까지 한국 성결교회를 사중복음의 기초 위에 열어 간 성결의 기수로서, 주경 신학자와 부흥 설교가, 또한 복음 전도자와 교육가, 독립운동가, 신사 참배 항거자, 저술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다. 성결교회는 그의 애씀과 몰아적인 헌신으로 인해 백여년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그 본연의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고, 미래의 다가오는 역사에 있어서도 순연한 복음의 빛을 비추는 시대적인 진리의 등불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