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대 이사장 홍대실 권사
이제 한국성결교회는 바야흐로 창립 100주년이라는 역사적 전기를 맞게 된다.
1907년 처음 경성땅 한복판에서 정빈과 김상준에 의해 다 쓰러져가는 구식가옥을 세내어 시작했던 한국성결교회는 이제는 예성과 기성, 그리고 미주성결교회를 합쳐 4,000 교회에 이르는 교세성장을 함으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단중의 하나로 까지 성장, 발전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한국성결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에서 시작되었고, 앞서서 성결교회를 힘있게 일구고, 씨를 뿌렸던 신앙선배들의 노력과 애씀에서 비롯되었다. 지나온 과거역사의 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장과 발전의 뒤안길에는 교단의 발전과 부흥을 위해 드러나지 않게 봉사하고, 헌신한 성결교회 여성들의 참여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한 세기간 성결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밑거름이 되어 온 여성들의 헌신과 봉사는 찬사를 받아야 하고, 그 공적이 있다면 마땅히 드러내어 성결교회의 여성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결인들에게 무한한 자긍심과 믿음의 용기를 주어 그들의 삶을 본받는 일이 계속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일에 있어서 한국성결교회(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초창기에 지대한 공을 남긴)에 큰 영향을 끼치고, 실로 모든 여성도들의 큰 귀감이 되는 믿음의 여장부 홍대실 권사의 생애를 기록하게 된 것은 오히려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홍대실(洪大實)은 1901년 10월 6일 평안남도 용강군 금곡면 월곡리에서 부친 홍석필(洪錫弼)과 모친 정건백(鄭健伯)의 2남 2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홍대실이 태어날 무렵 전후의 이 땅은 개화와 개혁의 추진력과 민족세력 형성의 에너지를 간절히 필요로 하였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파고 속에 20세기 초 한반도는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내정개혁을 통한 부국강병과 개화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고, 밖으로는 제국주의와 일제(日帝)라는 외세의 침략세력에 대항하는 자주독립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그러나 한말(韓末)이라는 암울한 역사적인 정황 속에서도 홍대실은 완고한 전통적인 유교가정이었지만 너그럽고, 인자한 아버님의 가르침과 어지신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 큰 어려움 없이 곱게 성장하였다. 홍대실은 어려서부터 매사가 분명하고, 영리하여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가지를 통달하여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부지런하여 잠시도 손을 그대로 두지 않고, 부모님을 돕고, 자신의 맡은 책임을 끝까지 완수하여 부모님의 큰 기대뿐만 아니라 동네 어른까지 칭찬이 늘 떠나지 아니하였다. 세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옛말과 같이, 그녀는 어린 아이 때에도 옳은 일이라면 남보다 앞장서고, 남의 힘들고 고생하는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도와주는 착한 심성을 가졌다. 이웃집 어르신네들이 눈이 어두워 실을 바늘에 끼지 못해 힘들어 할 때 ‘대실아’ 부르면 얼른 달려가서 도와드리고, 캄캄한 밤중에 허리 굽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두워 길을 잘 찾지 못하면 손을 잡아드리고 등불과 지팡이가 되어 집까지 모셔다 드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홍대실 권사는 일제가 나라를 강점하고 온 나라에 비통이 극에 달했던 소녀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 다사다난한 일들을 모조리 말하기에 앞서 우리의 땅이 붉은 마수의 손에 잡히어 잃어버린 땅처럼 되어버린 판국에서 제 어린 뼈는 굵어졌습니다. 완고한 가정 중에도 대표적인 엄한 가정이었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은 천진스럽게 보냈습니다. 할 수 있는 재롱과 꿈은 다 꾸었지요
그녀는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어디에다 쏟아내지 못하고 그 분을 삭이며 나라와 민족, 그리고 나라를 뺏긴 백성의 비통한 삶에 대해서 고민하며 보내는 중 1919년 3·1운동을 맞이하게 되었다. 모두가 주시하는 바와 같이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이후 민족주의적인 항일의식이 더욱 강하게 표출되어 1919년 3월 1일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는 복음수용 초기부터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저항세력으로 위상을 구축한 바, 다른 민족운동 세력과 연대하여 적극적으로 투쟁을 벌였다. 기독교인들은 계획, 준비단계에서 부터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교회도 수난을 당하고, 변화를 겪었다. 홍대실이 성장한 평남 용강과 가까운 강서 사천에서 3월 3일 학살사건이 일어나고, 정주에서도 3월 4일 - 4월 2일에 걸쳐서 학살, 방화사건이 터지고, 의주에서는 교회당이 불타는 등 3·1운동과 관련한 기독교인들의 피해가 막심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의 창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투쟁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홍대실은 교회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함께 좋은 인상을 받았고, 민족의 장래와 독립의 문제로 눈물을 쏟으며 뜬 눈으로 밤을 보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홍대실은 그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때 당시 3·1운동과 항일의 역사 속에서 점차 커가는 생의 귀착점에의 갈구는 끝내 나를 교회로 발을 들여 놓을 수 있게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섭리의 역사에 집행과정이었던 모양입니다.
온 나라에 3·1운동이란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온 백성들의 마음속에 독립의 열기가 충만하여져 갈 때, 홍대실은 같은 용강군에 살고 있는 장학섭 청년과 중매결혼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과 같이 개방된 결혼풍속이 아니라, 얼굴도 제대로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부모님의 소개로 결혼을 하였다. 장학섭은 장래가 촉망받는 유능한 사람으로 매사에 말수가 적었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생업을 구축할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하여 가계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손을 대는 일마다 흥왕되어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물질이 쌓이는 것에 비례해서 마음은 어딘지 모르게 한쪽이 비어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이 땅에서 하는 생업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삶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육신을 위한 생업은 구축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육신은 편했을지 모르나 정신적 장애에서 오는 고뇌, 세상의 모든 일이 소망적인 것 같으나 실의와 허탈감에 빠지게 하여 자신을 괴롭히게 할 때 물질의 소망은 없고, 물질에서 오는 육신의 안위는 극히 적게 확신할 수 있었으니 정신적 소망, 위로, 안일은 느껴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면 종교에 관한 깊은 내용이나 의식과 격식에 젖어든 기분에서 하는 그때의 수준은 아닙니다.
결국 이러한 마음은 영원을 사모하여 하나님을 갈망하는 데까지 발전되었고, 교회에 나가고 싶은 충동을 가지게 되었다. 2년 전부터 교회에 나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가득 찼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해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25살이 되던 어느 날 봄 남편은 그녀가 교회에 나가고 싶다는 간곡한 청을 하자 기쁘게 허락해 주었다. 그녀는 남편의 허락을 받자, 이내 다음 주일에 입석장로교회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하나님의 남다른 은총과 섭리가 있어서인가? 홍대실은 교회에 발을 디뎌놓기가 무섭게 신앙의 진보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열심히 교회를 출석하여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중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가 나의 구주가 된다는 대속의 가르침을 배우고 믿게 되었다. 신앙은 급진적으로 성장하였다. 2년 동안 열심을 다하여 교회에 출석하는 중에 입석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때 나이가 27세로 1928년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이때로부터 그녀는 하나님의 여종으로 훈련을 받아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이끌려 기도의 단을 높이 쌓고, 성경을 가까이 하여 매일 읽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터득하게 되어 구원의 도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제는 한 교회를 섬기며, 헌신하는 여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크게 사용되는 종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준비하고 계셨다:
2년 동안 열심을 다하여 교회에 출석하는 중 입석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해는 1928년 27세였으나 나의 인생은 참된 생활로 전환되려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한사람의 신앙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셈이지요. 나는 하나님이 기도하라는 대로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열심 있는 크리스챤이라고 까지 불리움을 받을 때 자신의 송구함과 면구스러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녀가 서른 살이 되던 1931년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통하여 남편의 고향인 용강군 지운면 진지리에 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성결교회를 설립하게 하였다. 진지리에 교회를 세운 것은 출석하는 입석교회가 거리가 먼 연유도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이보다 성경말씀을 읽다가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마가복음 16장 15절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에 큰 감동을 받은 데서 기인하였다. 홍대실은 구원의 방주인 교회를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자신의 사명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홍대실이 교회를 나가면서 간절히 기도하며 전도한 결과로 남편인 장학섭씨가 교회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이 세상 것을 끊고 교회를 잘 출석할 뿐만 아니라 아내가 기도하며 어렵게 내놓은 교회 건축의 뜻을 듣고 그 자리에서 쾌히 승낙하자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 결과 당시의 큰 돈인 200원으로 40평 교회 건물을 아름답게 세우게 되었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게 되자 그녀는 더욱 큰 힘을 얻고 교회봉사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봉사하는 중에 집사직분을 받게 되었다. 홍대실 집사는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며 힘든 줄도 모르고 주께서 세우신 교역자들을 섬기고, 교회의 힘든 대소사를 맡아 수고하면서 전도를 열심히 함으로 신앙의 모범된 삶을 살며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하였다:
하나님은 저의 마음을 헤아리시어 집사를 피택케 해주셨습니다. 저는 더욱 감사했습니다. 부족한 저를 택해 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더 할 수 있게 역사하여 주신데 대해 더욱 진실하게 감사하였으나, 일면 무겁고 힘이 든 일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수고한 자에게 은혜의 축복을 더욱 더 많이 허락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음을 저는 믿었습니다. … 우리 기독교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말씀에 주어진 진리의 반석을 견고히 하여 전도의 문을 열어 나가야겠습니다. 절망에서 산 소망으로, 사망에서 영생으로, 불신에서 믿음으로, 미움에서 사랑의 반석으로 이끌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두 부부의 전도와 봉사로 일관된 헌신의 삶에 축복하시고 생업에도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신앙반석이 견고해지는 만큼, 생활 기반도 든든해지게 함으로 물질의 큰 복을 누리게 하셨다.
홍대실 집사의 신앙이 무르익어 깊어져 가는 때인 1930년 후반 일제의 신사참배에 대한 양상은 격화되어 일제의 정체에 대한 충성으로서 교회에 대해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이러한 외압에 대항해 신사참배를 철저히 반대해 오던 장로교는 1938년 9월 9일에 평양 서문 밖 교회에서 개최된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문을 채택하고 평양신사에 참배하였다. 감리교는 이에 앞서 스스로 신사참배가 우상숭배가 아닌 국가의식에 속한다고 자인하고 무릎을 꿇었고, 총리사인 양주삼 목사가 앞장을 섰다. 신사참배의 바람이 성결교회에도 불어왔다. 1938년 이명직 목사의 이세신궁 참배 등 교단 지도부의 굴종이 있었으나 교단적인 가결은 하지 않았다. 성결교회는 사중복음 교리 가운데 재림의 교리가 일본천황의 존엄에 비례가 된다하여 1943년 5월 24일 성결교회 교역자와 장로, 집사 등 300여명을 검거하였다.
이때 홍대실 집사도 강제로 피검되어 옥고를 치르며 고문을 당하였다. 홍대실 집사는 옥고를 치루면서 고문을 당할 때 자신을 위해 십자가의 고초를 당하신 예수를 바라보며 기쁨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믿음으로 승리하였다. 홍대실 권사는 그 때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주를 말씀 한마디로 주관하시고 통찰하사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 인간이 간섭하는게 너무 많다할 수 있으며, 또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싸워 보려는 자가 많고 도전해 오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신앙생활해 오던 중에 일제 탄압으로 전국교회가 탄압을 받았고 물론 개인에 속한 탄압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이없는 죄목을 적용시켜 어떤 생트집이라도 잡아 마주 탄압했던 것입니다. 이리저리 눈치를 살펴가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변함이 없고 차질이 없으니 끝내는 신사참배란 명목하에 강제 연행, 고문 무지의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옥고의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지요. 그러나 주님은 나를 위해서 죽으셨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고초를 당하셨고 나를 위하여 부활하셨기에 그 체험을 고문으로 당할 때 내 마음은 기쁘고, 즐겁고, 평안한 가운데 평화만은 잃지 않아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축복하셔서 무난히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는 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은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 날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백의민족 전체 가슴속에 목 메이는 기쁨의 감격의 눈물을 경험하게 한 일제로부터 자유를 찾은 해방의 날이었다. 일제강점과 신사참배 강요로 인한 모진 박해가 끝나고, 해방과 더불어 1943년 교단이 해산되어 강단을 떠났던 교역자들과 개인 가정집 그리고 타 교단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성결교인들이 모여 성결교회를 다시 재건하는 운동이 활기차게 일어났다.1945년 11월 9일부터 성결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역사적인 기독교조선성결교회 재흥총회가 서울의 경성신학교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재흥총회를 필두로 성결교회가 전국적으로 교단재건에 힘쓰게 될 때 홍대실 집사는 해방이후 교세가 약하여 성결교회 재건에 주력하는 목사님들의 신앙지도를 받아가며 재건에 땀을 쏟고, 그때 받은 교훈들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게 되었다. 한창 재건의 땀을 쏟는 중에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당의 기습공격으로 인해 민족상잔의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홍대실 권사는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라 부산까지 온 가족이 남하하게 되었다. 당시를 홍권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일인의 신사참배 후 민족동란을 겪고 남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모로 고생스러웠으나 그때 그때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따라 생활에 안전함은 물론이려니와 신앙적으로 건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신 것도 또한 신앙인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포화가 그치지 않았던 피난기간 중에 성결교회는 부산 수정동에서 피란 총회를 개최하고, 동래온천교회를 임시교사로 하여 피란신학교를 열었다. 홍대실 집사는 부산 동래온천교회 집사로 피택 받고 전화의 어려운 지경에서도 충성과 봉사를 다하였다. 피난기간 중 서울 신학교가 임시로 세운 피난교회인 동래온천성결교회 집사로 있을 때 부인회 회장을 맡아 온갖 궂은 일과 힘든 일을 도맡아 수고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수복 후 온 가족이 함께 서울로 귀경하였다. 홍대실 집사는 서울로 올라온 후 1954년 성결교회 모교회인 중앙성결교회 집사로 임명받았고, 1959년에는 부인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회원 51명으로 구성된 부인회를 다년간 맡아 처음에는 농촌교회, 성락원, 신학교 보조를 하다가 교역자 생활보조와 수요축호전도, 미자립 교회 보조 등으로 사역의 범위를 넓히며 중앙성결교회 뿐만 아니라 교단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나타내었다. 그녀의 탁월한 리더십과 뜨거운 헌신은 홍집사를 중앙성결교회에만 묶어두지 않았다. 그것은 곧 성결교 신생부인회 전국연합회 부회장직을 수년간 맡아 교단적으로 전국부인회를 이끌며 전국을 대상으로 순회사역을 하고 교단의 전체적인 상황을 돌아보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해방이후, 신사참배 유무로 인해 장로교에서부터 시작된 분열현상은 자유주의 대 보수주의의 싸움으로 치닫다가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밖으로 밀려오는 외래사조와 단체의 영향을 받아 다시 분열의 가속화 현상을 드러내었다.
성결교회도 1960년대로 들어오면서 교단분립이라는 열병을 앓기 시작하였는데, NCC (Nathioal Council of Church 한국기독교 연합회) 연합운동기관과 NAE라는 신앙운동단체로 인해서였다. 성결교회는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와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복음동지회) 두 단체에 가입하였는데, 처음에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시간이 흐를 수록 한 교단에 두 단체를 각기 옹호하는 그룹으로 나누어짐으로써 양쪽의 이해가 달라 갈등이 심화되었다. 따라서 1960년 4월 제 15회 총회에서는 두 기관을 동시에 탈퇴할 것을 토의할 예정이었으나 4·19가 터져 불행하게도 총회가 정회되었다. 서울신학교 교수단은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고 WCC의 한국지부인 NCC에서 탈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학장 이명직 목사도 대전에서 속회된 총회에서 NCC를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NCC 거두인 학장 김창근 목사는 탈퇴반대를 주장하였다. 이어서 표결에 들어갔는데 그 결과는 두 기관에 대한 동시 탈퇴안이 보류되고, 그 해결은 16회 총회로 넘어갔다. 그러나 1961년 4월 11일에 열린 16회 총회는 이월된 보류안이 거론되지 않고 오히려 이전과 달리 NCC에 더 많은 대표가 파송되고, NAE 대표는 축소시키는 결정을 내려 탈퇴를 주장했던 사람들로부터 반감과 격분을 일으킴으로써 폐회에 앞서 퇴장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이로써 16회 총회는 교단분립의 불씨를 일으킨 불미스런 총회가 되었고, 양 기관 탈퇴를 주장하였던 이명직, 김응조, 한보순, 이성봉 목사, 그리고 홍대실 집사가 출석하던 중앙성결교회 당회장인 황성택 목사를 중심으로 복음진리동지회가 조직되었다. 복음진리동지회는 1961년 5월 1일 전국교회에 보낸 성명서가 기성 총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1962년 4월 24~26일에 성결교회의 모교회인 중앙성결교회에 모여 제 17회 총회를 개최하고, 교단명칭을 교단 초기명칭인 ‘예수교’로 환원하여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발족하였다. 형제가 갈라서는 분열의 고통 속에 서울신학교가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 남게 되자, 성결교회 본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1962년 9월 2일에 서울 충정로 김응조 목사 사저에 성결교신학교 임시교사를 마련하고 명예 학장에 이명직 목사, 초대 학장에 김응조 목사, 부학장 겸 교수로 황성택 목사가 취임하였다. 9월달 개교하기 전인 3월 13, 14 양일간에 중앙성결교회에서 신입생 전형을 한 결과 신입생 34명과 2, 3학년 편입생 15명 총 49명을 선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인 가정집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 학생은 많고, 신학교 교사가 마련되지 않아 학생들이 수업을 받을 때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다.
일년이 지난 1963년 50명을 더 모집하여 좁은 집에서 100여명이 북적대고 공부하므로 신학교 교육환경은 더욱 악화되었다. 김응조 목사는 이러한 절박했던 초창기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50명 학생을 상하층을 망라해서 한 집에 수용하니 마음은 한없이 기쁘나 육체는 사단에게 시달리어 괴롭다.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기 위하여 김치, 간장, 된장, 고추장 바가지를 들고 다니면서 이 집 저 집을 헤매는 광경도 가관이다. 말구유에 태어나신 주님을 생각하면 이것도 감사하였다. 다음 해에 또 학생을 모집하니 역시 50명이다. 이제는 100명이 한 집에서 법석대는 판이다. 온 집안에 사람 천지이다. 안방과 복도까지 공개해도 100명을 수용하기는 불가능이다. 비용문제도 막심하다.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교장 김응조 목사는 일 년 전에 ICCC국제대회 참석과 성결교 신학교 건립기금을 목적으로 도미하여 별 성과가 없이 훼이스(Faith)신학교 객실(guest room)에서 소일하며 안타깝게 시간을 보내다가 기도하는 중에 “너는 어찌 미국 사람만 쳐다보느냐? 한국에도 하나님이 계시니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한국사람 가지고도 신학교를 얼마든지 지을 수 있으니 안심하라”는 음성을 듣고, 귀국하였다. 김목사는 바로 그때 약속받은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눈물로 한달을 기도하는 중에 “기도만 하지 말고, 그 사람을 찾아보라”는 음성을 다시 듣고, “아멘”하고 곧 일어나서 방명록을 만들어 찾아나선지 이틀만에 마침내 하나님께서 예비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주께서 예비하신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중앙성결교회의 홍대실 집사였다. 이미 북한에서 죽음의 38선을 넘어올 때 홍대실 집사는 “살아서 남한으로 우리 식구들이 무사히 넘어가면 하나님을 위해서 큰일을 하겠습니다”라고 주님께 서원한 상태였다.
홍대실 집사는 김응조 목사가 자신을 찾아와서 성결교신학교를 건축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고 조심스럽게 권고를 하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기쁘게 허락하고 지금의 서울 종로구 행촌동 (현, 예성총회 본부건물과 목회신학교 건물 자리)에 대지와 3층 교사를 짓는 모든 건물 비용을 혼자 감당하였다.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말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 교계는 자랄 수 있는 위치에서 부흥발전 중이었으나 우리 재단에 신학교가 없어 하나님의 종들은 열심 있는 기도를 하는 종들이 많이 있었지요. 현재의 행촌동에 있는 신학교는 우리의 원로 목사이신 김응조 목사님의 줄기찬 기도의 노력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던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 때 김목사님은 사택에서 신학생 50-60명을 모아 부족한 위치에서 가르쳐 왔으나 해가 바뀌움에 따라 학생 수용능력이 부족함으로 새 학교 터전을 달라고 기도한 끝에 예산 없는 신학교 부지 및 건축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로 결정지었읍니다. 그 때 목사님의 노고는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었지요. 목사님은 우리 집을 방문하셔서 자세한 계획을 말하여 주시면서 권사님은 얼마나 신학교 건축기금으로 헌금하시겠읍니까? 하는 말씀으로 저를 인도하시더군요. 그때 주의 종을 저에게 보내주심이 하나님의 뜻이였지요.
홍대실 집사는 1963년 11월 10일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 238평의 3층 벽돌건물을 완성하고, 이듬해인 1964년 8월 20일에는 다시 4층 62평을 증축하여 교사를 확장시켜 주었다. 여성의 혼자 힘으로 한 교단의 신학교 건물을 지어 봉헌한 것은 한국교회 역사에 있어서 보기 드문 예외적인 일이었다. 홍대실 집사는 4층 건물이 세워진 후 성결교신학교가 세워지고, 곧 학교가 발전궤도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때의 그 신학교가 아주 면모를 갖추어 세운지 오래되지 않았으나 타 신학교에 앞서 가기가 서운할 정도로 많이 발전시켰읍니다.
홍대실 집사는 신학교 건물을 지어 봉헌하는 그 해에 중앙성결교회에서 초대 권사로 피택되었다. 1964년 중앙성결교회에서는 교회가 1907년 복음전도관으로 세워진 이래 최초로 3명의 권사를 세우게 되었는데, 그들은 홍대실 권사를 포함한 이용진, 서용란 권사이었다.28) 부족한 자신을 권사로 세우신 하나님께 홍대실 권사는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남은 생애를 주님의 영광과 성결교회의 발전을 위해 살기로 다짐하였다. 그녀는 성결교신학교 수용관리가 현재 시설로는 교단의 교역자 수요에 부족함을 느끼고, 기도하는 중 남편에게 동의를 얻어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미래 백년을 바라보며 자신이 보유한 경기도 안양시 안양 8동의 22,228평을29) 학교교지로 기증하여, 성결교신학교의 안양 캠퍼스시대를 열게 하였다. 성결교신학교는 홍대실 권사가 건립한 행촌동 건물을 신학교 건물로 사용하면서 발전의 계기를 갖게 되었다. 건물 건립 이후 성결교신학교는 문교부에 ‘학교법인 성결교신학원’ 재단 설립을 신청하고 1964년 12월 16일 설립인가를 받게 되었다. 1966년에는 4년제 정규대학과 동등한 학력인가를 받음으로 대학으로서의 굳건한 발판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홍대실 권사는 성결교신학교 초대 이사장인 김영순 장로에 이어서 1968년에 일 년에 이사장이 두 번 바뀌는 어려운 중에 이사회의 만장일치의 결정으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성결교 신학교 4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그녀는 3년이란 짧은 시간이었지만 소천할 때까지 학교 발전을 위해 지사충성하였다.
이사장 홍대실 권사의 헌신과 기도로 현재 성결교신학교는 ‘전인적인 하나님의 사람’을 설립이념으로 기독교 명문을 지향하는 성결대학교로 발전되어 지금은 6개 단과대학, 6개 대학원, 재학생 5,000명이 넘는 종합대학교가 되었다. 홍대실 권사는 교단지도자를 배출하는 교육선교에만 힘쓰지 않고, 교회 개척에도 온 힘을 쏟아 생전에 그녀가 건립한 교회는 진지동성결교회를 비롯하여 강릉교회, 온양교회, 묵호교회, 속초교회, 백은교회, 고길리교회, 대전성결교회까지 총 8개 교회를 신개척하는데 모든 재정을 감당하였다. 교단기관지인 「성결」에서는 강릉교회의 건축비를 전담하여 새 성전을 건축한 홍대실 권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64년 9월부터 1965년 3월까지: 1964년 9월 30일에 대지 170평을 일금 319,400원에 매수하고 등기 이전한 후 동년 10월 1일에 당시 교단 총무 이성호 목사님의 사식으로 정초식이 있은 다음 건평 45평의 성전 건축이 착공되어 1965년 3월 5일 공사비 938,763원으로 준공하여 고 이성봉 목사님, 이성호 목사님, 홍대실 권사님을 모시고 윤길중 목사의 사식으로 성전봉헌식을 거행하게 될 때 눈물의 감격이 있었으며 3월 5일 신축 교회당에서 헌당기념성회를 이성봉 목사님을 모시고 갖어 큰 은혜를 받었다. 건축비를 전담하여 새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바치신(머리돌에 새겼음) 홍대실 권사님의 은혜는 말로 다할 수 없고…
이러한 놀라운 결과가 있기까지는 홍권사의 애씀과 헌신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옆에서 묵묵히 도와준 장학섭 남편의 적극적인 협력도 빼놓을 수가 없다:
제가 계획했던 모든 것을 그이에게 이야기하면 순수하게 저보다 더 한걸음 나아가서 이해하고 협조하여 주신 것이 전부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소원은 문서전도도 중요하지만 일정지역 정주민의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유형적 교회 건립을 하나라도 세우고자 그이에게 종용하였읍니다.
홍대실 권사가 평생 하나님 앞에 가진 선한 뜻은 ‘너희는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께 받은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 실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첫째는 물질을 바쳐 유형적인 교회를 세워 죽어가는 영혼들을 복음으로 구원하고, 둘째는 그 일을 위해서 필요한 목회자들을 배출하는 신학교를 직접적으로 후원(신학교 건립과 경제적 협력)하는 것이 자신의 생의 유일한 목표와 즐거움이었다.
홍 권사는 주께 받은 이 사명을 위해 어릴 때 습관과 같이 근면과 성실을 생활의 전부로 삼았고 열성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맡아 헌신하는 일에 매진하였다.32)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충성과는 다르게 때로는 사람들에게서 오해와 미움을 받기도 하였다. 자신과 자신의 식구들에게는 매정하리만치 철저한 내핍과 인색함(?)을 보였고, 반대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후하게 기쁨으로 바치며, 복음을 전할 주의 종들에게 한없이 베푸는 헌신의 여종이었다. 그녀의 삶에 대한 일화는 한편의 신앙 드라마를 연상할 정도로 감동적이며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준다. 그녀에 관한 많은 일화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그녀의 모습을 한 번 보고 기억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일 년 내내 똑같은 한 벌 옷만 입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2) 홍권사의 경제관의 일면을 보는 한 예로, 매년 봄이 되면 시장에 나가 닭 부화장에서 암병아리와 숫병아리를 200내지 300마리 를 사서 창고에서 길렀다. 그리고 병아리들이 커서 닭이 되어 알을 낳으면 그 계란을 가지고, 가까이 섬기는 목사님들부터 교회사찰에 이르기까지 먼저 갖다 드리고, 시골 개척교회 목회자들이 서울에 올라오면 닭을 판 이익금으로 그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대접하고, 교통비를 꼭 챙겨드렸다.
3) 또한 잔치집에 가면 식사하고 버리는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모두 주워왔다고 한다. 홍권사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아랑곳 않고 모두 수거하여 몇 번 깨끗이 씻고, 가마솥에 넣고 푹 끓이고 난 뒤 햇볕에 말려 자연소독한 뒤 이것을 가지고 교단 지방회 모임, 개척교회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재활용 나무젓가락을 내놓았다.
4) 그리고 진로회사를 운영할 때 곡물을 뜨고 찌거기가 남으면, 그것을 버리지 않고 돼지에게 사료로 먹여 축산으로 연결시켜 이득을 남겼고, 그 돈을 가지고 하나님께 물질 봉사를 하였다고 한다. 철저한 경제관념에다 재활용 정신 그리고 몸에 배인 근검함에는 그 누구도 홍대실 권사를 따라 갈 자가 없었다.
5) 지금은 어머니의 큰 뜻을 누구보다도 깊게 이해하여 어머니의 신앙과 정신을 본받아 살기를 갈망하는 막내딸인 장명숙 집사가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홍권사는 여느 있는 집 부모같이 축하하며 새 옷을 사주지 않고 입학식 때 입고 가라면서 내놓은 옷은 결혼한 딸의 시누이가 입다가 안입고 옷장에 버려둔 코트를 뒤집어서 만든 옷이었다.
그녀는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지독한 깍쟁이, 구두쇠로 불릴 정도로 가족과 친지,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까지도 철저한 검약과 근검정신으로 살고 돈을 아껴,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과 교회설립에 아낌없이 투자했던 하나님 앞에 부요한 신앙의 여종이었다. 먼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충성하고, 헌신할 때 주께서는 덤으로 물질의 축복을 주셔서 사업의 번창함을 주셨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삶을 잘 알지 못하는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호의호식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이해했지만 실은 회색저고리에 밤색 빛이 나는 치마를 평생 입고, 고무신 터진 곳을 꿰매어 신으면서 하나님의 사업에 물질과 시간과 정성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정말 하늘에 상급을 쌓아두고 살았던 신실한 일꾼이었다.
그리고 전도에 있어서도 남다른 열성을 가지고 가족친지를 비롯하여 많은 영혼들을 주 앞에 인도하였다. 그녀의 열성적인 전도로 조상대대로 절에 다니며, 일 년에 14번 제사를 지냈던 막내사위의 집이 하루아침에 제사를 폐지하고, 교회 나와서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추도예배를 드린 놀라운 일도 일어났다.
아들인 장익용 장로는 “어머님께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친지에게까지 인색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근검과 절약의 삶으로 한평생을 일관하셨고, 종이 한 장까지 아껴서 모으시는 분이셨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복음전파를 하는 일에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희생하며 드렸던 헌신과 믿음의 살아 있는 본을 보이시며 사셨던 분”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막내 사위인 고병헌 회장은 “어머님은 근검절약의 정신아래 경제관념에 철저하신 분으로 하나님 중심의 봉사에 자신의 참된 가치를 두고 모든 것을 희생, 봉사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어머님은 쓰고 남는 것 가운데 있는 것 중에 부스러기 얼마를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고, 땀과 노력에 의해서 수확한 것을 가지고 자신은 물론이고 자식이나 식구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철저한 헌신의 삶을 사셨던 존경스러운 분이셨습니다”고 회고하고 있다.
홍대실 권사는 1968년 4월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성락원 원장으로 취임하여 알게 모르게 은퇴한 여교역자 중에 무의무탁(無依無托)한 교역자와 미망인목사 사모님들을 돌보는 일들도 소리 없이 하였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부름 받아 일평생을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을 위해 살아온 홍대실 권사는 아침마다 일어나서 불렀던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찬송가 가사처럼 찬송과 기도를 드리며 감사하는 중에 주께서 그녀를 위해 예비해두신 영원한 집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홍대실 권사가 주께 부르심을 받은 날은 1971년 3월 2일이었고 사인(死因)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바쁘게 주를 위해 살다가 얻은 위암이었다. 갈라디아서 6장 6절의 말씀대로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주께서는 홍대실 권사 슬하에 1남 4녀에게 복의 근원이 된 아브라함의 자손처럼 큰 복을 내려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게 하셨다. 첫째 아들은 8년간 독일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주)진로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주)서광, (주)쥬리아 회장으로 있으며, 신학교에 장학금을 기증하는 등 물질적인 봉사를 할 뿐만 아니라 성결교회의 모교회인 중앙성결교회의 장로로 헌신, 봉사하고 있는 장익용 장로이고, 며느리는 백기춘 권사이다. 첫째 딸 장오룡 권사는 성결대 이사를 수년간 맡아 어머니의 일을 이어서 수고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남편 전기하 씨는 우천개발(주) 이사로 있다. 둘째 딸은 장현숙 권사, 사위 설학인 집사는 미영산업(주) 대표로 있고, 셋째 딸 장경자와 사위 윤창엽 씨는 미국에 도미하여 잘 살고 있다. 그리고 막내딸인 장명숙 집사와 사위 고병헌 집사는 (주)금비, (주)금비 화장품 회장으로 있다. 특별히, 고병헌 회장은 목회자 양성을 위해 세운 성서침례신학교에 초헌도서관을 단독으로 지어 헌납하는 등 후손 모두가 하나님께 충성된 삶을 살며, 홍대실 권사의 뜻을 받들고 있다.
홍대실 권사, 그녀는 칠십 평생을 오로지 하나님과 주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 그리고 예수교대한성결교회와 성결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삶을 살았다.
그녀의 삶은 ‘大實’이란 이름 뜻대로 하나님을 위해 큰 열매를 맺은 아름다운 신앙의 삶이었다. ‘잘 오셔서 큰 일 하시고 잘 가셨습니다’(성결대 성결관 앞 기념비에 새겨진 비문내용 전문)라고 평한 성결대 설립자 김응조 목사의 말대로 홍대실 권사는 주님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위해 하나님 앞에 큰일을 하고 살다간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여장부요, 헌신의 여종이었다.